문화라는 이름의것들

[스크랩] 서울 성곽 걷기 1차 혜화문에서 동대문, 남산, 남대문

늘푸른재가노인복지센터 2011. 3. 14. 12:35

길 위의 역사학 시리즈 걷기 1회로 서울 성곽 혜화문에서 남대문 코스를 걸었다.

2011년 3월 12일 오후 1시에 4호선 한성대 입구역 4번 출구에서 나길도 회원들과 만났다.

일행은 꽃향유님, 메싸이님, 메싸이 동행님, 달이님, 산티아고님, 동행2분, 레몬트리님,

리치걸님, 샨티님, 동행 1분, 함박님, 정만님, 가람이 아빠님, 당선생 15명이 걸었다.

 

한성대입구 4번 출구에서 나오면 S-Oil 주유소가 보이고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카톨릭대 담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서울 성곽이 보인다. 낙산駱山 둘레를 끼고 있는 성인데 조선초기에 계획도시로 지어진

한양도성 안 낙산부근 혜화동 명륜동은 백정들이 거주하라고 내어 주었다 한다.

동소문은 1992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니, 가장 최근에 다시 세운 문이다. 

유교의 伍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한양 안의 건축물로 구현한 조선건국의 이데올로그 삼봉 정도전은

之門(흥인지문), 敦門(돈의문) 혹은 彰門(창의문), 崇門(숭례문), 弘門(홍지문), 普閣(보신각)

이렇게 도성 안에 각 문과 누각 이름에 유교적 이상을 붙였다.

 

풍수지리의 비조(鼻祖) 도선선사가 이미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예언한 것처럼, 王씨에 이어 李씨가

백악산(북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청와대 뒷산이니 경북궁의 주산이다) 인근에 도읍을 정할 것이라 하여

고려 때에 백악산 인근에 오얏나무(李, 자두나무)를 심었다가 무성해 지면, 잘라내곤 했다 한다.

서울 토박이들의 기억에 따르자면, 70년 대까지도 백악산 뒷편 세검정 인근에 자두 나무가 많아 자두

따먹으러 소풍을 오기도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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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성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삼선동에서 숭인동까지 걸어보면 거리가 얼마 안되 듯 최단거리를 성벽으로 이어 놓은 길을 걷고 난 뒤,

이렇게 가깝냐고 말들을 하신다. 성벽을 끼고만 걷기로 한 터라 대학로가 내려다 보이는 코스가 아니라

낙산 인근의 장수마을이 보이는 길이었다. 삼선동, 창신동, 숭인동 등 낡은 주택들을 재개발 하려 했으나

시공할 건설회사들이 채산성이 맞지않다 포기하고 난 뒤 속칭 달동네의 정취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으로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택의 내외부를 개량하되 재개발을 않은 조건으로 정비하고있다.

그런 연유로 장수마을이라 이름을 짓는다.

 

문화재법상 건축행위를 하다가 유물이 발견이 되면 건축주가 발굴을 하고, 보존을 해야 한다는 일제시대

문화재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넋나간 복지부동 공무원들의 官위주의 정책이 건설업자들의 타산에

맞지 않아 땅만 파면 문화재가 발굴되는 서울 도성 부근에서 공사를 할 얼간이가 누가 있으랴.

하기는 자신의 표를 의식해서 아무렇지 않게 유적이 있는 곳을 파헤치는 서울시장들이 즐비한 형편이니

 말해 무엇하랴.

 

 

 

 

 

 

동대문에서 동묘를 거쳐 광희문으로 향했다.

 

동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崇仁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동관왕묘(東關王廟)라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57.5척(尺), 측면 4칸, 63.5척의 단층 정자형(丁字形) 기와지붕집이다.

중국의 관우(關羽)를 봉사(奉祀)한 묘사(廟祠)로서 1601년(선조 34) 준공되었다.

정전(正殿)은 평면이 앞뒤로 길쭉한 직사각형을 이루며, 내부는 본실(本室)과 전실(前室)의 두 부분으로 나뉘고

 중간에는 문짝을 달아 사이를 막았다. 좌우 측면과 후면은 전벽(塼壁)을 쌓고 전면에는 살문을 달았으며

다시 주위에는 전면을 제외한 3면에 좁은 툇간(退間)을 돌렸다.

공포(拱包)는 익공계통(翼工系統)의 건축으로서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지붕은 특수한 평면에 따라 복잡한

정자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는데 본실에는 중앙 뒤쪽에 단(壇)을 만들어

관우의 목상(木像)을 안치(安置)하였고, 그 좌우에는 권속(眷屬)인 관평(關平)·주창(周倉) 등 4인의 상이 있다.

정전 전면은 석단(石壇)의 면적을 넓히고 그 아래 앞뜰에는 동서무(東西?)가 있으나 역시 중국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정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一廓)을 담장으로 둘렸고 전면에 다포집 계통의

중문(中門)이 있으며, 그 밖으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익공계통의 정문을 배치하였다.

동묘는 중국의 묘사건축형식(廟祠建築形式)을 본받았으므로, 그 평면이나 외관(外觀)은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는 달리 매우 색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자의 곳를 文廟, 관우를 모신 사당은 武廟라 한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몽진(왕의 피난을 몽진이라 한다)을 갔던 선조는 명나라의 원군과 의병들의

승전으로 한양을 다시 찾은 선조는 명나라에 더 의지하게 되고, 사신들이 참배하기 원해 關帝廟를 동대문

밖에 지었다. 중국인이 모여사는 세계 곳곳의 차이나 타운에 문묘 보다 더 많이 관제묘(무묘)는 지어져 있다.

순수 민간 신앙으로 무속인들이 최영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관우는 神이다. 그 후 청나라에 의지했던 고종은 급기야 관우의 상에 금박을 입힌다.

 

 

 

  

동묘의 관운장을 모신 본체는 공사 중이다.

인기가 높은 관우를 모신 탓인 지 근처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

풍물시장이 청계천, 황학동, 동대문 운동장을 떠돌다가 동묘 근처에 자리 잡았다.

외부의 번잡함과는 상관없이 동묘 안은 한적하다.

 

 

 


水口門, 혹은 屍口門이라 불리던 光熙門 주변의 성곽복원 한 곳,

풍수지리 상으로 북문은 음란한 기운이 들어 온다하여 거의 열지 않았고, 홍제천으로 난 길,

弘智門으로 통행을 많이 했다. 대문 사이에 소문을 내었던 터라 한양 도성의 나쁜 기운을 뽑아내는 문을

만들고자 하여 풍수지리에서 음기를 상징하는 물이 나가는 문이라하여 수구문이라 이름지었다.

물이 아니라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수맥이 흐른다 하는 것처럼 물기운을 뽑아내는 문이라 하였고 실제로

도성안에서 죽어나간 시체가 많이 나갔다고 하여 시구문이라 별칭으로 불렸고,

지금도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광희문이라는 명칭보다 그 이름이 익숙하다.

 

 

장충단 공원이다. 이준 열사 상.

 

 

 

동국대에서 남산공원으로 넘어가는 길.

 

 

 

 

 

 

조선 태조, 세종, 숙종, 세차례 대공사로 축조된 성곽은 백악산 뒷편에 가면,그 당시 전국에서 부역을 하러 온

백성들이 남긴 표시를 찾을 수 있다. 세종 조에는 함경도 북청에서 온 백성들이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다시

불러와 쌓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대문으로 내려가는 길, 다음 주 남은 구간을 같이 걷기로 오늘의 길벗들과 약속을 했다.

주민등록증도 갖고 와야 창의문에서 삼청동 구간을 통과할 수 있다고, 일행들에게 경험자가 친절히 알려주신다.

 

 

 

 

 고집스런 강골 강사장님, 손님에게 절대 친절하지는 않다. 특히 예의없는 것들 한테는.........

 

 

 기계식맥주 냉장고. OB본사에서도 고장나면 못 고치더라고, 흥분하시는 강사장님,

인근 청계천 기술자가 손쉽게 고치더라고....... 안도의 한숨.......... 30년 째 생맥주를 쏟아내고 있다.

 

 

끝까지 남은 다섯명이서 30년 전통 을지로 3가 OB호프에서 맥주한잔, 을지면옥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이구동성으로 더 걷자고 의견 통일, 이때부터는 나길도 수요도보의 깃발 정만님이 깃발이시다.

신설동에서 청계천을 벗어나 귀가 했다.

 

 

출처 : 마 바 라 증권 當 樂 友 ZIM
글쓴이 : 당선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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