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이름의것들

용서가 그리 쉬운건가요../영화< 밀양 >

늘푸른재가노인복지센터 2007. 5. 24. 21:32
용서가 어디 그리 쉬운 건가요?
[리뷰] 이창동 감독의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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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포스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2시간이 넘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몰아치듯 깊은 감정의 굴곡으로 밀어 넣는다. 울다가 웃다가 주연 배우의 연기는 흠 잡을 데 없었고, 극단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영화 속 공간에 와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실적이었다.

적당히 너스레를 떨 줄 아는 카센타 김사장 송강호가 구사하는 경남 사투리는 현지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더 현지인 같았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을 아이 엄마가 되어 보지 않고도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는 전도연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였다.

고향에 가 살고 싶다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편 고향에 살러 온 신애. 주위 사람들에게 불쌍한 여자 혹은 박복한 여자로 인식되기 싫어 돈깨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다 결국 돈을 노린 유괴범에 의해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는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한 인간이 어떤 슬픔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이 영화 탄생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자식을 잃는 슬픔과 견줄 만큼 아픈 상처는 이 세상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머니가 된 신애. 아무도 그를 구원해 줄 수 없다.

카센타 김사장은 그녀 곁을 맴돌면서 한 번도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대해 원망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세상의 고난 따위는 애초에 자신과는 무관한 것인양 그저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고민 없이 맡겨두고 살아가는 그는, 신애와 같은 밀양 땅에 살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신애는 슬픔을 잊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살 수가 없다. 수시로 아들 준이 생각이 몰려오는 탓에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택했다. 속좋은 카센타 김사장은 교회에도 열심히 따라간다.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신도들을 바라보는 김사장의 생경한 눈빛은 얼마나 그 풍경과 유리된 모습인지.

열심히 교회에 나가 신에게 의지하여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신애는 어느 날 아들을 죽인 유괴범에게 면회 가서 그를 용서해주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래야만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이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신애
들꽃을 꺾어 면회 간 날, 신애는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유괴범은 이미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고 더없이 마음 편하게 지낸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애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벌써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아 자신이 고통 받고 있을 동안 마음 편하게 지낸 유괴범을 어떻게 해야 하나.

표면적으로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결과로 비쳐졌지만 신애 마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면회를 가지 않는 편이 나았을 법했다. 유괴범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애 뿐이다. 마치 자신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박탈당한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애는 또 다른 종류의 아픔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신애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다. 자살을 시도했고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퇴원하는 날, 카센타 김사장은 신애에게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었는데 신애는 제일 먼저 머리를 손질하고 싶어 한다.

▲ 아이를 보낸 후 망연자실한 신애와 카센타 김사장
미용실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머리를 손질해주는 이의 얼굴을 보자 신애는 아연실색한다. 바로 유괴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자의 아이가 지금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그리고 알은 체를 한다. 소년원에서 나와 학교도 그만두고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 눈물의 의미는 뭔가. 아비의 범죄에 대한 사죄의 뜻인가. 짧지만 불행한 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솟구치는 눈물인가.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다. 치료를 끝내 이제 좀 안정을 되찾나 싶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유괴범의 딸과 만나게 된 건지 신애는 신이 원망스럽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의 힘을 빌어 용서해보려 했건만,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아 더 이상 자신의 죄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용서는커녕 더 큰 분노가 쌓이는 아이러니를 어쩌면 좋은가. 신애는 과연 그를 용서했을까.

극장문을 나서자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는데 영화의 여운이 발길을 옮겨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흐느껴 울어봤다. 서른 셋에 싱글 맘이 된 것도 가슴 아픈데 생명과도 같던 아이까지 잃게 된 가여운 신애가 이전의 모든 아픔에서 벗어나 새 삶을 설계할 수 있을까.

좋은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영화가 얼마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지, 놀라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역시 관객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당신이라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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